어느 비판정신과의사와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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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판정신과의사와 이태원 참사
장창현 대표원장 (느티나무의원 정신건강의학과)
어느덧 A님을 뵌 지는 6개월이 되었다. 이태원 참사로 따님을 잃으셨다. 처음 뵐 때부터 나는 어떤 묵직한 절망감에 압도되었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A님의 슬픔과 고통, 절망과 분노에 어떠한 진단명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정신과 의사로서 돕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세 가지 정도만 생각했다. ‘우선 마음을 풀어놓으실 공간을 마련해드리자.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A님의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함께 살피자.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정신의학적 지식을 통해 버티시는 데 도움을 드리자.’
너무나도 잘 버티어내셨다. 따님의 빈자리를 매일 매 순간 느끼셨지만 A님과 가족 분들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 버티어내셨다. 딸이 있는 것 같이 얘기한다고 하셨다. 그럴 만 하다. 이건 증상이 아니다. 애도의 과정이다. A님의 배우자 분은 본업을 내려두시고 10. 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일에 발 벗고 나서셨다. A님은 일터에서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엉뚱한 소리를 하면 분에 받혀 용기 있게 대거리를 하시기도 했다. “참 나... 참 나...” 어떻게 사람으로 그렇게 할까 나도 같이 화를 내고, “잘하셨다”고 말씀드렸다. 필요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심에 대해서도 마음 깊이 응원했다.
매일 매일 잠을 못 이루시겠다고, 저녁에 맥주 한 캔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이룬다고 하셨다. 잠이 안 와서 드신다는 멜라토닌은 꾸준히 챙겨 드시자고, 술은 잘 버티셔야 하니 몸을 생각해서 줄이시자고 말씀드렸다. 술을 대체할 벤조디아제핀 계열 수면진정제 로라제팜을 소량 쓰면서 점차 줄여가고 잠을 도울 졸림 효과가 있는 항우울제 트라조돈과 다른 항우울제 에스시탈로프람을 소량 드렸다. 잠을 조금이라도 주무시고 버티시는 마음을 돕기 위한 최소한의 처방이었다. 다행히 (술과 같이) 의존성이 있을 수 있는 로라제팜은 점차 줄여갈 수 있었고 나머지 두 약을 유지했다.
비판정신과의사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약물 치료의 기간을 고민하게 될 때가 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날 오후 면담 시간에 나는 A님과 약 사용 기간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된 적이 있다. 나는 상담을 하며 어지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정신과 약을 계속해서 드시기보다는 어느 정도 버티실 수 있겠다 싶으시면 차차 줄여 가셔도 됩니다. 보통은 안정기가 6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약으로 도움 받음보다 불편감이 더 크게 느껴지신다면 그 때가 줄일 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큰 삶의 변화가 없는 안정기에 보통 약을 줄여가곤 합니다. 지금이 8월이니 약을 쓴지 4개월 정도 되었지요. 말씀드린 6개월 시점이 되면 차차 줄여갈 수도 있지만, 10월은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기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지도 않게 10월 얘기를 꺼내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내 가슴에서부터 온 몸으로 슬픔이 파문 일 듯 퍼져나갔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우리 둘 다 눈에 촉촉한 것이 맺혔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심호흡 후에 겨우 말을 이어갔다.
“10월에는 힘드실 수 있으니 약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년 봄까지는 유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함께 잘 버티어 가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할게요.”
어느 덧 우리의 마음을 저리게 한 10월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누군가에게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는 평생에 무거운 슬픔으로 다가오는 계절이다. 세상의 중심은 아픈 곳이라고 프란체스코 교황은 말했다. 오늘 대한민국의 중심은 어디일까? 나는 오늘, 10월 29일에 대한민국의 중심인 시청 앞 광장으로 향하려 한다. 많은 분들을 그곳에서 만나고 마음껏 함께 눈물 흘리고 싶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외쳐야겠다.
<10.29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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